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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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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s: |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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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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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2: | 중세・근세의 유파와 학파(中世・近世の流派と学派) |
Title | 진기도가 |
Japanese Title | 神祇道家 |
Text | 신도를 가업(家業)으로 하는 집안을 총징해서 이르는 말이다. 옛날 궁정의 제사를 담당하고 진기관(神祇官)의 직무에 종사한 나카토미(中臣)씨・인베(忌部)씨와 같은 진기(神祇)씨족을 들 수 있다. 『古語拾遺』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진기관의 부민으로는 나카토미(中臣), 인베(斎部), 사루메(猿女), 가가미츠쿠리(鏡作), 다마츠쿠리(玉作), 다테츠쿠리(盾作), 가무하토리(神服), 시토리(倭文), 오미(麻続) 등의 성씨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카토미, 인베 등의 두 세가지의 성씨만이 있고, 나머지 여러 성씨는 선택되지 않고, 신의 자손이 없어지니 잎도 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9세기 초기에는 진기관의 씨족이 고정화되어 다른 여러 씨족은 쇠망해 갔다. 헤이안(平安)시대 말기가 되면 진기관 집안은, 장관(長官, 하쿠伯)으로는, 가잔(花山)천황의 자손인 시라카와하쿠오가(白川伯王家)가 세습하게 되고, 차관(次官,후쿠副)으로는 오나카토미(大中臣)씨와 우라베(卜部)씨가 승임하게 되었다. 인베(忌部,齋部)씨는 끊어졌기 때문에 이 세 성씨가 신도의 집안으로서 지위를 확립하였다. 진기관 가문, 즉 ‘진기도가’로서 공인받은 것은, 무로마치(室町) 후기에 성립된 요시다신도(吉田神道・唯一神道)를 계승한 우라베씨의 요시다가가 전국의 신관을 거느리고 신도계에 군림하고 나서부터이다. 근세의 조정에서 구게(公家)의 가문별 직책을 기록한 『諸家々業記』에는 ‘신기도시라카와(神祇道白川), 후지나미(藤波), 요시다’라고 쓰여져 있고, 이것은 하쿠오(伯王)씨의 시라카와가(白川家), 오나카토미 제주(大中臣祭主)인 후지나미가(藤波家), 우라베의 요시다가, 이 세 집안이 진기관 직업을 잇는 집안으로 간주되었다. 이미, 에이쿄 5년(永享,1433)에 고코마츠(後小松)천황이 죽었을 때, 상복을 입는 기간인 료안(諒闇)에 대해서는 제비뽑기로 정하고, 진기하쿠(神祇伯)인 마사카네왕(雅兼王), 제주(祭主, 오나카토미大中臣)인 기요타다(清忠), 요시다칸누시(吉田神主)인 가네토미(兼富) 등 3명이 사택에서 제비뽑기를 하였다(『師郷記』). 여기서 진기칸의 세 집안이 선택되고 진기관 씨족의 집안으로서 신도삼류의 지위가 거의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같은 상황일 것이다. 단, 오나카토미씨의 후지나미가, 우라베씨의 요시다가가 각각 하나의 집안으로 결정되는 것은 무로마치시대 이후의 일이다. 시라카와하쿠오가(白川伯王家)는 헤이안 말기에 가잔겐지(花山源氏)에서 나온 아키히로오(顕広王)가 하쿠(伯)에 취임한 후부터 그 자손이 맡게 되었다. 가마쿠라(鎌倉)시대 중기에는 시라카와라하고, 일족이 분류되어 하쿠의 지위를 두고 싸운 일도 있었다. 이 집안은 『니혼쇼키(日本書紀)』연구의 연찬(硏鑽)에 주력하는 등, 진기관 집안으로 자립한 시기도 한 때 있었으나, 무로마치시대에는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었고, 차관인 요시다 카네토모(吉田兼倶)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요시다가의 아래에 서는 일도 있었다. 근세 초기의 마사타카왕(雅喬王) 때부터 가학(家学)의 연찬에 힘쓰며 핫케(伯家)신도를 형성해 갔다. 가로쿠(家禄,무사에게 주는 봉록)는 지교다카(知行高)의 땅 200석, 하쿠의 신사료(神事料)는 현재의 쌀 30석이다. 오나카토미 제주인 후지나미가는 아메노코야네노 미코토(天児屋根命)의 자손, 도키와(常盤)가 나카토미무라지(中臣連)의 성을 받아, 나라(奈良)시대 후기에 우대신(右大臣)인 나카토미 키요마로(中臣清麻呂) 때에 오나카토미(大中臣)가 되었다. 이후, 진기관의 요직(하쿠伯 또는 후쿠副)를 차지함과 동시에 이세신궁의 제주로 근무하고, 연중 4번 있는 신궁제사에 참석하는 것 외, 신군(神郡)의 경영에도 관여하고, 이세의 토지에 대해서도 강한 권한을 가졌다. 헤이안 중기 이후는 미야카와(宮川)상류의 이와데(岩出)에 저택을 두고, 그 일족이 번영했다. 무로마치 후기가 되어서는, 이세의 생활이 불안정하게 되어 이와데에서 교토로 돌아가, 카게타다(景忠) 때에 도죠쿠게(堂上公家)에 복귀하고, 후지나미를 칭하게 되었다. 후지나미제주가(藤波祭主家)는 이세의 오카미에 종사하는 것을 큰 임무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핫케신도와 같은 신도설을 내세우는 일은 없었다. 이세의 제주직과 함께 다이죠에(大嘗会)의 세치에(節会)에 천신(天神)축사를 올리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봉록은 173석, 제주료(祭主料)는 666석이다. 우라베요시다가(卜部吉田家)는 이즈우라베(伊豆卜部)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진기관의 점술(亀ト,거북점)를 담당하는 것을 직업으로 해 왔는데, 점차 지위를 높여서 진기행정에 근무하고 차관까지 승진하는 집안이 되었다. 『니혼쇼키』를 비롯한 가학(家学)을 쌓고 서적을 소중하게 보존하여 전했다. 무로마치 중기의 카네히로(兼凞) 때에 처음으로 구교(公卿)에 열거하고, 요시다를 가호(家号)로 했다. 무로마치 후기의 카네토모(兼倶) 때에 가학의 전통을 이용하면서, ‘신신도(新神道)’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신도를 창도했고, 오닌의 난(応仁の乱) 후에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네토모 이후의 요시다가의 당주는 진기쵸죠(神祇長上)라 하고, 진기도의 종가(宗家)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메이지초까지 전국의 신사와 신관을 지배하고, 신도계에서 절대적인 세력을 가졌다. 봉록은 760석이었다. 이 세 집안은 메이지가 되면 백작 아래의 자작(子爵)이 된다. 진기도라는 용어는 중세 후기의 요시다신도가 사용하였기 때문에, ‘진기도가’란 신도계에 널리 유포되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요시다가를 가리키는 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나중에는 전통적인 진기관의 대표적 집안으로서 위의 세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다. 세 집안이 신도를 가업으로 여겨왔는데, 조정내의 직책에는 각기 분담이 있었고, 각각의 집안이 옛부터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제사를 모셨다. 요시다가는 요시다신도를 주장하며 자신이 지배하는 신관의 확대에 힘썼는데, 근세 중기부터는 요시다가에 대항하는 형태로 시라카와가의 핫케신도가 대두되어 신도계의 2대 세력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오카다 쇼지(岡田荘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