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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Links: |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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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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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2: | 중세・근세의 유파와 학파(中世・近世の流派と学派) |
Title | 쓰치미카도신도 |
Japanese Title | 土御門神道 |
Text |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清明)이래, 음양도(陰陽道)의 아베씨(安倍氏,후에 쓰치미카도가土御門家)에게 전해진 천문술이나 역술(暦術) 등을 근세 중기의 음양두(陰陽頭,음양사 우두머리)인 쓰치미카도 야스토미(土御門泰福)가 스이카(垂加)신도와 이세(伊勢)신도 등을 바탕으로 집대성한 신도를 말한다. 아베(安倍)신도, 안케(安家)신도, 덴샤(天社)신도, 덴샤(天赦)신도라고도 한다. 단, 야스토미 자신은 시부카와 하루우미(渋川春海)에게 지금부터 안케신도라 하고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와 와타라이 츠네아키라(度会経晃)가 가리키는 곳을 우익(羽翼)이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음양도는 스이코(推古)천황 11년에 백제의 승려 관륵(観勒)이 전했다고 한다. 그 후, 율령제로 인해 음양료(陰陽寮)는 중무성(中務省)의 산하에 두고, 장관인 음양두(陰陽頭)는 천문 기상에 이변이 생기면 음밀하게 상주(上奏)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헤이안(平安) 시대, 기비노마키비(吉備真備)의 자손으로 간주되어 역(暦)・천문의 두가지 도에 통달한 가모노 야스노리(賀茂保憲,917~977)는 역도(暦道)를 그의 아들 미츠요시(光栄,939~1015)에게, 천문도(天文道)를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에게 전했다. 그 후, 역도는 가모노가(賀茂家, 나중의 고토쿠이가幸徳井家)가, 천문도는 아베가가 각각 전하게 되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아베 아리나게(安倍有脩,1527~77)가 아베가로서는 처음으로 궁전에 오르는 것을 허락받고, 종삼위(従三位)를 수여받은 뒤 쓰치미카도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쓰치미카도가는 항상 음양두로, 고토쿠이가는 음양조(陰陽助)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아리나게의 아들 히사나게(久脩,1560~1625)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수십만석이었다고 여겨지는 가록을 빼앗기고, 히데츠기(秀次)의 부하로 가담하였다는 죄로 교토(京都)에서 추방당해 오와리(尾張)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와카사쿠니(若狭国) 오뉴군(遠敷郡) 나타쇼(名田庄)에 히사나게가 창건한 태산부군사(泰山府君社)가 현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와카사(若狭)로 도망쳤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게이쵸 5년(慶長,1600)에 출사(出仕)하고, 그의 장남인 야스시게(泰重,1588~1661)는 쓰치미카도가를 이어받았다. 차남인 야스요시(泰吉,1599~1670)는 구라하시가(倉橋家)라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음양두는 고토쿠이가의 도모카게(友景), 도모타네(友種), 도모스케(友博)의 3대가 계승했지만, 야스시게의 손자인 야스토미(泰福)가 음양두가 되고, 덴와 3년(天和,1683)에 레이겐(霊元)천황으로부터 쓰치미카도가에게 여러 지방의 음양도 지배를 맡긴다고 하여, 이후 쓰치미가도가가 음양두를, 구라하시가는 음양조를 세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쓰치미카도가는 요시다(吉田), 시라카와(白川), 후지나미(藤波)와 함께 천황의 제복이 하사됨에 따라 신가(神家)로 불리게 되었다. 음양사는 길상(吉祥)을 부르고, 부정을 물리치고, 옥체안온(玉体安穏)・천하태평을 기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황위계승에 동반하여 한 세대에 한번 있는 덴소치후사이(天曹地府祭)는 음양도의 신들에게 천황의 마음 속에 담긴 기원을 주상하는 중대한 제의이고, 고미즈노오(後水尾)천황까지는 난덴(南殿, 시신덴紫宸殿)에서 행해진 공적인 제사였다. 따라서 이 마츠리(祭)는 천황의 즉위의례의 일환인 불교의 닌노우에(仁王会)와 대등한 음양도의 즉위의례였다. 하지만 그 후 덴소치후사이는, 쓰치미카도가의 사택내의 ‘본궁’이라 불렸던 태산부군(泰山府君)을 모시는 사당에서 행해지는 사적인 제사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황실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행사였기 때문에, 제사 비용은 금리(禁裏)에서 쓰치미카도가에게 하사했다. 그리고 신분은 낮지만 칙사의 참향(参向)이 있고, 칙사가 지참한 천황의 의복을 모셔서 옥체안온을 기원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덴소치후사이를 야소시마제(八十島祭)나 라죠제(羅城祭)의 부활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쓰치미카도 야스토미는 이 마츠리를 태산의 봉선(封禅, 마츠리)과 비슷하고, 일본은 천황을 모시고 있지만, ‘天人合一之道’에 이른다면, 중국도 일본도 기이츠(揆一)라고 해서 덴켄(天譴)사상에 근거한 옥체안온・성수장구(聖寿長久)뿐만 아니라 천하태평・만민화락(万民和楽)도 음양의 신들과 천신지기(天神地祇)에 기도했지만, 에도 시대의 덴소치후사이는 옥체안온・성수장구를 주로한 사적 제사였던 것은 변함이 없다. 쓰치미카도신도는 메이지 3년(1870) 윤10월 17일에 메이지정부에 의해 파괴되고, 천문과 역(暦) 두가지의 도를 전수하는 권리도 메이지정부에 빼앗겼다. 제2차세계대전 후 종교의 자유하에서 쓰치미카도 노리타다(土御門範忠)를 관장으로 덴샤츠치미카도(天社土御門)신도로 다시 일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 쓰치미카도 야스토미(土御門泰福) 니시오카 카즈히코(西岡和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