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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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カテゴリー2: 중세・근세의 유파와 학파(中世・近世の流派と学派)
Title
요시다신도
Japanese Title
吉田神道
Text 무로마치(室町) 후기 이후, 근세를 통해서 진기계(神祇界)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신도설이며 유파이다. 요시다 카네토모(吉田兼倶,1435~1511)에 의해 창시되었다. 카네토모 자신은 ‘유이이치(唯一)신도’, ‘소겐(宗源)신도’, ‘겐폰소겐(元本宗源)신도’ 등으로 불렀지만, 현재는 ‘요시다신도’, ‘우라베(卜部)신도’라는 호칭이 일반적이다. 요시다가(吉田家)는 원래 성이 우라베(卜部)이고 점술(亀ト,거북점)로 조정에 봉사하는 집안이었다. 이즈(伊豆) 지방사람인 우라베 히라마로(卜部平麻呂,807~881)를 시작으로 그의 증손자인 카네노부(兼延) 때에 진기대부(神祇大副)에 취임하였는데, 이 때부터 그 관직을 세습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 후 이 가문은 요시다와 히라노(平野) 두파로 나뉘어졌지만, 둘다 종래의 점술 외에, 『니혼기(日本紀)』 등 고전 및 고대의 역사 연구를 직업으로 삼았다. 특히 히라노가(平野家)에서는 가마쿠라(鎌倉)시대에 카네부미(兼文)와 카네카타(兼方)가 나와서 활약을 하였다. 이 때문에 ‘日本紀の家’(『太平記』巻二十五)으로 불렸다. 그러나 남북조(南北朝)시대가 되자, 히라노가는 쇠퇴하고, 대신에 요시다가가 흥성하였다. 특히 무로마치시대 중기에 카네히로(兼煕,1348~1402)는 ‘신도의 원로(神道之元老)’(『吉田家日次記』)로 존칭되어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처음으로 당상(堂上)의 서열에 올랐다. 그 후 3대를 거친 뒤 나온 이가 카네토모였고, 그는 그 때까지의 가학(家学)적 전통과 축적을 배경으로 독자적인 신도설을 수립했다.
요시다 카네토모는 에이쿄 7년(永享,1435)에 카네나(兼名)의 아들로 태어나서 오닌 원년(応仁,1467)에 궁전 출입을 인정받고 진기권대부(神祇権大副)가 되었는데, 바로 이 해에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일어났다. 이 때 교토(京都)에 있는 요시다저택은 소멸되고, 다음 해에는 요시다사(吉田社, 현 요시다신사)도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신도설을 구상한 것으로 보이며, 분메이 2년(文明,1470)에는 ‘宗源神道誓紙’를 정해서 다음 해부터 몇 명의 귀족들(公卿)에게 신도전수를 행했다. 또 이 때 자택 내에 제장소(斎場所,사이죠쇼)로 불리는 제사 장소(奉斎場)을 설치하여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위해서 발원문(願文)을 올렸다. 그 후 분메이 5년 제장소에서 ‘만잡일예일역(万雑一芸一役)’이라는 통행세(通行税)를 징수한다는 취지의 칙명 결재를 얻었다. 또 그 제사 장소가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제사를 만든 것과 연관되며 전국 여러 사당의 근원이 된다고 보고하고, 그 해 비경(秘経)이라는 「神明三元五大伝神妙経」의 독송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카네토모 자신이 창작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 시기에 이미 가네토모의 교설은 상당히 정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때부터 『中臣祓』과 『日本紀』의 강의・전수를 자주 실시하여 귀족과 무사, 승려들 사이에서 많은 신봉자를 배출하였다. 분메이 8년에는 자신을 ‘신도의 원로(長上)’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한 지지를 배경으로 그는 분메이 16년 요시다산(吉田山) 위에 대원궁(大元宮) 제장소(斎場所)를 건립했다. 그것은 중앙에 팔각의 사원(社殿、즉 大元宮)을 두고 그 주변에 이세양궁(伊勢両宮), 팔신전(八神殿), 식내삼천여사(式内三千余社)를 배치한 것으로, 이를 통해 요시다신도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카네토모의 교설 개요는 이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그 주된 저작 『唯一神道名法要集』에 의해 알려졌다. 이 책에 의하면 종래의 신도는 혼쟈쿠엔기(本迹緑起)와 료부습합(両部習合)신도였는데, 이에 반해 요시다의 그것은 겐폰소겐(元本宗源)신도이다. 이것은 음양불측(陰陽不測)의 근본인 원(元), 일심을 다한다는 본(本), 일기미분(一気未分)의 모토가미(元神)인 종(宗), 그리고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신화(神化)를 밝히는 원(源)을 합한 것으로,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太神)와 아메노코야네유주일류(天児屋根唯受一流)의 신도이며, 구니토코타치(国常立尊, 大元尊神)를 주된 신으로 한다. 교설은 현로교(顕露教)와 음유교(陰幽教)로 나누어진다. 현로교란 『先代旧事本紀』・『古事記』・『日本紀』를 소의경전으로 하고 천지개벽과 신대(神代)의 유래, 그리고 왕신(王臣)의 계보를 밝힌다. 현로교는 천신・지기・인귀(天神・地祇・人鬼)를 모시고, 그 행사를 외청정(外清浄)으로 삼는다. 한편 음유교는 천원신변신묘경(天元神変神妙経), 지원신통신묘경(地元神通妙経), 인원신력신묘경(人元神力神妙経)으로 삼재(三才)의 영응(霊応)과 삼묘(三妙)의 가지(加持), 삼종(三種)의 영보(霊宝)를 설명하며, 거기서의 수법(修法)은 내청정(内清浄)으로 한다. 그리고 신도를 체용상(体用相)으로 구별하여 삼구묘단십팔신도(三九妙壇十八神道)를 세운다. 이것은 신도가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로 가득하다고 하는 요시다신도의 근본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카네토모는 자가의 신도설을 ‘삼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설명하고 독자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실은 그 교리는 밀교, 음양도(陰陽道), 도가(道家) 및 도교의 교설이 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 경향은 이세(伊勢)・료부(両部) 이후의 전통을 잇는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선대 이상으로 대대적으로 행하였고, 여러 종교와의 습합 속에서 전개한 중세 신도설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제의수법(祭儀修法)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신도고마(神道護摩), 소겐행사(宗源行事), 십팔신도행사(十八神道行事,이것을 총칭해서 삼단행사三壇行事라고 한다), 북두제(北斗祭), 안진제(安鎮祭), 천공제(天供祭) 등의 요시다신도 제의는 모두 밀교적・음양도적인 요소가 농후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네토모는 소겐센시(宗源宣旨)・신도재허장을 발행해서 신위(神位)・신호(神号)의 수여권(授与権) 및 신관의 임명권을 독점하였는데, 이것으로 요시다신도설이 전국으로 전파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카네토모가 사망한 후, 한 세대를 거쳐 뒤를 이은 요시다 카네미기(吉田兼右,1516~73)는 전대보다 넓은 범위로 소겐센시・신도재허장을 발행하는 한편, 가끔 몸소 행차하여 지방사관에게 요시다신도의 보급을 꾀했다. 그의 아들 요시다 카네미(吉田兼見,1535~1610)・본슌(梵舜,1553~1632) 형제는 노부나카(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에게 접근하여 지위 향상에 힘썼고, 근세로 들어가면 「諸社禰宜神主法度」(1665)에, 요시다가의 신사지배가 인정됨에 따라 그 지위는 완전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세신도의 부흥, 요시카와(吉川)신도, 스이카(垂加)신도의 대두가 있었고, 또 하야시 라잔(林羅山), 데구지 노부요시(出口延佳), 덴노 사다카게(天野信景), 우스이 마사타네(臼井雅胤) 등에 의한 요시다신도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에 대응하여 요시다가에서는 스이카파(垂加派)의 마츠오카 유엔(松岡雄淵,1701~83)을 학두(学頭)로 맞이하여 스이가신도설을 수용하려 노력했고, 『日本神祇正統記』・『神業類要』 등의 호교서(護教書)를 저술하는 등 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요시다 신도는 신도 사조(思潮)의 주류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었고, 신사지배에 대해서도 근세 중기 이후에 시라카와(白川) 진기하쿠(神祇伯) 가문과의 쟁론이 빈발했다. 그러면서도 요시다 신도의 지배권은 근세를 통해서 유지되었고, 그러한 지배권은 게이오 4년(慶応,868) 여러 가문의 신사 관리와 지배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요시다 카네토모(吉田兼倶)
이토 사토시(伊藤 聡)

Pronunciation in Japanese/用語音声

요시다(吉田)신도의 도통도(道統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