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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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カテゴリー2: 중세・근세의 유파와 학파(中世・近世の流派と学派)
Title
료부신도
Japanese Title
両部神道
Text 진언밀교계(真言密教系) 신도설의 총칭. 이세신궁(伊勢神宮) 내궁을 태장계대일(胎蔵界大日), 외궁을 금강계대일(金剛会大日)로 설명하고, 그 외 여러 신의 본지(本地), 국토생성의 내력, 국호의 유래, 왕권의 근거 등에 대해 하나하나를 밀교교리에 부회(附会)시킨 신도설이다. 호칭의 유래는 요시다신도의 조상인 요시다 카네토모(吉田兼倶,1435~1511)가 그의 저서 『雄一神道名法要集』에 세가지 신도(三家神道)를 세우고 그 하나로서 ‘료부습합(両部習合)신도’를 들었다. 즉, “태장계와 금강계의 양계가 내궁과 외궁이고, 각각의 부처가 각각의 신이다. 때문에 료부습합신도라고 한다”라고 정의한 것에 의한다. 아울러 카네토모는 료부습합신도란 덴교(伝教), 고호(弘法), 지카구(慈覚,円仁), 지쇼(智証,円珍)들이 설명하는 것이라 하여, 진언(真言), 천태(天台)에 편승한 붓카(仏家)신도의 총칭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후세에는 천태종계를 산노(山王)신도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고, 료부신도는 진언종계의 신도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정착되어 있다. 따라서 신곤(真言)신도라고도 한다. 단, 나중에 기술하는 것과 같이, 료부신도설의 성립을 둘러싸고는 진언계보다는 오히려 천태계의 영향이 강하고, 료부신도가 반드시 진언계라고도 할 수 없는 면이 있어서 그 정의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료부신도설은 헤이안(平安) 말기부터 가마쿠라(鎌倉)・남북조시대(南北朝期)에 걸쳐 이세신궁 주변에서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전기(헤이안말~가마쿠라 중후기)와 후기(가마쿠라 후기~남북조시대)로 대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전기에서는 헤이안 말기 『天照大太神儀軌』(宝志和尚伝)가 가장 빨리 저술되었고(1164년 이전), 이어서 『三角柏伝記』, 『中臣祓訓解』(혹은 記解)가 가마쿠라 초기에 성립되었다. 이들 초기의 신도서에서 공통되는 점은 천태사문파(天台寺門派)와 관계가 깊다는 것으로, 『儀軌』는 온죠사(園城寺) 쇼젠(証禅)이 전래시키고, 나머지 두 저서는 온죠사의 영향 하에 있었던 시마쿠니 요시즈미쿠리야(志摩国吉津御厨) 선궁원(仙宮院)에서 저술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후 가마쿠라 중기까지 『漢朝祓起在三月三日上巳』, 『仙宮院秘文』, 『天地霊覚秘書』, 『大和葛城宝山記』, 『大宗秘府』 등이 성립되지만, 이 중에서 『秘文』은 엔닌(円仁)이 편찬, 『秘書』는 사이쵸(最澄)가 편찬한 것이다라는 등, 역시 천태계의 색채가 짙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宝山記』, 『大宗秘府』는 교키(行基)가 편찬한 것이고 이세신도의 초기에 저술된 『宝基本記』도 교키가 저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것은 교키가 신궁과 불교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배경에 있다. 즉, 도다이사(東大寺) 창건을 둘러싼 교키참궁(行基参宮)의 전승이 있는데, 이 전승을 형성한 당시의 승려 참궁에 대한 열기의 고조가 료부신도설 성립에 깊이 관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 이세신도설의 성립에는 전기의 료부신도 서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상이 전기의 료부신도 서적의 특색이라고 한다면, 후기는 동밀(東密, 真言密教)의 영향이 강하다. 그 배경에는 에이손(叡尊)를 중심으로 한 동밀계의 신궁참배에 대한 열기의 고조(1273・1275・1280), 게다가 다이고산포원(醍醐三宝院)의 쓰카이(通海)에 의한 호라쿠샤(法楽舎)의 창건(1275) 등을 계기로 하여 동밀의 영향력이 신궁주변에 강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료부신도 서적의 특색으로서는 구카이(空海)에게 가택한 전서(伝書)가 많이 저술되었는데, 이는 그 이전에는 『訓解』를 제외하고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 시기의 서적으로는 『麗気記』, 『神明秘訣』, 『両宮形文深釈』, 『両宮本誓理趣摩訶衍』, 『続別秘文』, 『豊受皇太神継文』, 『大神宮秘文』 등이 있다. 이들 서적은 모두 다 구카이의 저작이라 하여 적어도 1320년경에는 성립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서적의 성립에는 전기와는 반대로 이세신도로부터의 영향이 보이고, 료부신도와 이세신도가 상호적인 영향 관계 하에 형성되어 온 사정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후기 료부신도의 특색은 이세라는 장소를 떠나 오노(小野)・히로사와(広沢)의 양파가 여러 사원에 널리 서로 계승되어 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큰 존재였던 것은 미와류(三輪流)신도와 고류(御流)신도이다. 미와류신도는 미와산의 오고린사(大御輪寺) 및 뵤도사(平等寺)를 중심으로 계승된 것이고, 같은 지역에서는 종래부터 미와뵤도사의 고엔(慶円,1140~1223) 및 그 문류에 의한 신기설(神祇説)이 형성되었는데, 에이손(1201~90)의 오고린사 창건(1285)을 계기로 미와에 료부신도설이 전래되어 발전을 이루었다. 그 초기의 저작은 『三輪大明神縁起』(1317년 성립)로 내용은 다카마노하라(高天原)의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와 이세신도산(伊勢神道山)의 고타이신(皇太神)과 미와다이묘진(三輪大明神)은 삼신즉일(三身即一)의 대일여래(大日如来)라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한편 고류신도(御流神道,大師流神道)는 무로사(室生寺)에 살고 있던 엔카이에 의해 14세기 초경에 조직되었던 것 같다. 무로사는 이세에서 가깝고, 또 엔카이는 이세의 야마다(山田)에 있는 세이기사(世義寺)의 중흥과 관련이 있다는 전승이 있다. 또, 그가 에이손의 제자인 닌쿠(忍空)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세의 료부신도설 및 이세신도가 무로사에 도입,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료부신도 여러 파의 전수는 밀교의 전법관정(伝法灌頂)에서 배운 진기관정(神祇灌頂)으로 불리는 법식에 의해 행해졌고, 이세관정(伊勢灌頂), 니혼기관정(日本紀灌頂), 레이기관정(麗気灌頂)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중세에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들 료부신도설에 대한 이야기는 『古今和歌集』의 주석이나 요곡(謡曲) 등의 문예에도 많이 받아들여져 사원을 넘어서 넓은 층에 향수되었다.
료부신도는 근세 이후에도 계속하여 각지의 사원을 중심으로 계승되었다. 『麗気記』 이후의 료부신도 서적이나 미나모토 요시야스(源慶安)의 『両部神道口決抄』 등의 여러 설을 모은 서적이 출판되는 한편, 쥬카(儒家)신도나 국학으로부터의 료부신도에 대한 비판도 강해져, 붓카(仏家)측에서도 이것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나왔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지운손쟈(慈雲尊者) 온코(飲光,1718~1804)의 운덴신도(雲伝神道,가츠라기葛城신도)의 창시를 들 수 있지만, 메이지의 신불분리령으로 인해 료부신도설은 완전히 부정되고 역사의 표면에서 그 모습을 지우게 되었다.
➠붓카신도(仏家神道)
이토 사토시(伊藤 聡)

Pronunciation in Japanese/用語音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