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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Links: |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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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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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2: | 근대의 교단(近代の教団) |
Title | 이즈모오야시로교 |
Japanese Title | 出雲大社教 |
Text | 교파신도 교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신도13파 중 하나이다. 센게 타카토미(千家尊福,1845~1918)가 조직을 만들었다. 타카토미는 메이지유신기에 종교행정에도 깊게 관여하고, 그 동향을 두루 살펴서 이즈모오야시로교의 결성에 힘썼다. 이미 근세의 이즈모오시(出雲御師)가 오쿠니누시대신(大国主大神)의 신덕을 발양(発揚)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각종의 신사츠(神札) 배포와 기도 외에, 지방의 유력자가 참배할 때에 숙박장소를 제공하며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와 지방의 숭배자들을 연결하였다. 이것이 이즈모오야시로교의 기반을 형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신후, 메이지 정부가 종교행정의 개혁에 착수하자, 타카토미도 그에 대응한 이즈모타이샤의 조직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이즈모타이샤 신앙을 중심으로 신자 포교를 하기 위해서, 각지의 이즈모코(出雲講)와 기노에코(甲子講) 등을 조직화하고, 메이지 6년(1873) 1월에 이즈모타이샤 게이신코(敬神講)를 결성한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게이신코를 교회조직으로 확대시켜 이즈모오야시로교회 설립을 신청했다. 11년에는 오야시로교회 출장소가 도쿄의 간다(神田)신사 내에 설치되었다. 15년에 신도타이샤파로 독립했다. 같은 해 11월에 신도타이샤교로 개칭했다. 타카토미는 같은 해 3월, 이즈모타이샤구지(出雲大社宮司)를 사임하고 다이쿄세이(大教正)에 전념했다. 메이지 17년에는 신도오야시로교의 초대관장이 되었다. 타카토미는 21년에 관장을 사임하고 정계로 몸을 돌렸다. 타카토미의 조카인 센게 타카아키(千家尊愛,1866~1919)가 제2대 관장이 되었다. 센게 타카모치(千家尊有,1890~1954)가 제3대 관장이었던 다이쇼(大正,1912~1926)부터 쇼와(昭和,1926~1989) 전기에 걸쳐서 국내뿐만 아니라 사하린, 조선, 대만, 또 호주, 하와이까지 포교소가 있었다. 타카모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쇼와 29년에 사망할 때까지 관장을 역임했다. 그 후, 종교법인 이즈모오야시로교의 관장으로서 센게 타카노부(千家尊宣,쇼와 29년 취임~38년 사임), 센게 미치히코(千家達彦,쇼와 38년 취임~현재)가 취임했다. 쇼와(昭和) 21년에 종교법인령에 의한 법인이 되었다. 26년에는 종교법인법의 공포에 따라, 이즈모타이샤를 이즈모오야시로의 종사(宗祠)로 하는 조직으로 변경, 이즈모오야시로교로 읽는 법을 바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쇼와 30년대에 들어서 신자수도 교사수도 급격히 감소하였지만, 최근에는 약간 증가하는 경향이 보인다. 긴키(近畿), 시코쿠(四国) 등 서일본에 신자가 많다. 【본부】島根県簸川郡 【공칭신자수】약119만명(문) ➠센겐 타카토미(千家尊福) 이노우에 노부타카(井上順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