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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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カテゴリー2: 근대의 교단(近代の教団)
Title
덴리교
Japanese Title
天理教
Text 메이지(明治)부터 패전까지, 가장 규모가 컸던 신종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신도13파의 하나이다. 덴보 9년(天保,1863) 10월,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1798~1887)가 돌연 신에 들렸는데, 덴리교에서는 이것으로 미키가 ‘가미노야시로(신이 머무는 곳)’로 정해졌다고 하고, 10월 26일을 입교일로 한다. 그 후 순산의 수호나, 수두 등의 병고치기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포교는 겐치 원년(元治,1864)경부터 본격화되었다. 미키는 메이지 20년(1887)에 사망하지만, 그 혼은 언제까지나 살아서 ‘모토노야시키(원래의 집)’인 나카야마가(中山家)에 머물러 수호한다고 믿고 있다. 다음 해 21년 신도덴리교회로서 공인받고나서, 교세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만, 메이지 정부의 단속이 이어지고, 29년 내무성으로부터 각 부현 경찰기관에 이른바 비밀훈령이 내려져서, 이를 전후로 하여 대중매체에 의한 음사사교(淫祠邪教) 캠페인도 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신도체제하에서 교의나 의례의 정비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덴리교가 일파독립하는 것은 41년이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해외포교가 시작되어, 다이쇼(大正) 말에는 비약적으로 교세가 증대되었다. 그리고 쇼와 4년(昭和,1929)에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1905~67) 2대 신바시라(真柱)가 교무에 전념하게 되자, 교단이 새롭게 충실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도, 정부의 사상통제로 인해 크게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패전 후, 억압받고 있던 교리나 의례를 원래대로 바꾸고, 교조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움직임이 ‘복원(復元)’이라는 구호 하에서 이루어지고, 교조전(教祖伝)과 교전(教典)이 간행되었다. 일시적으로 가입하고 있던 교파신도연합회도 쇼와 45년에 탈회하고, 신도색을 불식했다. 또 교의연구와 신자의 교화교육, 복지와 의료, 학교교육, 신자의 수행 등의 시설로서 사용되는 ‘오야사토야카타’의 건설이 29년부터 개시되어 이것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교리나 의례는 나카야마 미키가 제시한 것을 원천으로 한다. 미키는 게이오 2년(慶応,1866)부터 의례의 형식과 내용을 차례로 정비하고, ‘미카구라우타’를 만들어 메이지 2년부터 15년에 걸쳐 ‘오후데사키’를 집필한다. 덴리교에서는 이 두 서적과 미키의 만년의 가르침과 본석(本席)이라는 지위에 있는 이부리 이조(飯降伊蔵,1833~1907)의 가르침을 기록해서 편집한 ‘오사시즈’를 ‘원전(原典)’으로 한다. 거기서는 부모신(親神)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인간이 마음을 바꿔가는 것에 따라 이상의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등이 기술되어 있다.
【본부】天理市 【공칭신자수】약188만명(문)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
유미야마 타츠야(弓山達也)

Pronunciation in Japanese/用語音声

덴리교 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