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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Links: |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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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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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2: | 근대의 교단(近代の教団) |
Title | 혼미치 |
Japanese Title | ほんみち |
Text | 덴리교(天理教)의 교사였던 오니시 아이지로(大西愛次郎,1881~1958)가 창시한 교단이다. 교리 및 교례도 덴리교색이 농후하다. 다이쇼 2년(大正,1913) 아이지로는 스스로 ‘간로다이인의 이치(甘露台人の理)’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4년, 나라현(奈良県) 다케우치(竹内)에 덴리교의 『오사시즈』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덴리연구회를 발족시킨다. 아이지로는 자신이 간로다이(甘露台)라고 덴리교내에 호소하지만,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궁빈 속에서 포교를 계속했다. 쇼와 3년(昭和,1928), 전쟁과 국가멸망의 위기를 예언으로 경고하고 천황의 신격을 부정하는 내용의 『연구자료(研究資料)』를 배포해서 관계자가 검거되었다. 불경죄로 기소되어 덴리연구회는 해산을 명령받지만(제1차 혼미치사건), 5년에 대심원에서 오니시 아이지로는 무죄, 신자들도 거의 집행유예가 되었다. 그 후, 교단은 재건되어 11년에는 명칭이 덴리혼미치(天理本道)가 되고, 덴리교 교회에 대한 포교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13년에 『연구자료』와 같은 취지의 『서신(書信)』제1~7호를 배포한다. 치안유지법위반, 불경죄로 전국에 걸쳐 일제히 검거되고, 결사의 금지해산을 명령받았다(제2차 혼미치사건). 그러나 패전으로 전원이 석방되고, 21년 피고 전원이 면소(免訴)되었다. 그리고 이 해 이미 다카이시시(高石市) 하고로모(羽衣)로 옮겼던 사무소를 본부로 옮겨 본격적인 교단재건이 시작되고, 종교법인령에 의한 법인이 되었다. 27년 종교법인법에 의한 법인. 아이지로는 33년에 사망하는데 현재 손자인 오니시 야스히코(大西泰彦,1960~)가 아이지로의 환생으로 간로다이로 여기고 있다. 또 54년에 그 때까지 신도가 아닌 사람에게는 문을 닫고 있던 본부를 개방하고, 다음 해부터 3년간에 걸쳐 ‘혼미치 소개의 모임’을 행했다. 현재 혼미치의 신도 ‘안내인(みち人, 미치비토)’의 활동에는, 가르침의 수행과 그 실천으로 ‘니오이가케(匂いがけ)’와 ‘히노키신(매일의봉사근무)’이 있다. 니오이가케는 주로 개인단위로 행해지는 전도・포교이고, 히노키신이란 노동봉사에 의한 시설의 건축이나 유지관리를 행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할 필요성을 자각하는 ‘고코로노후신(心のふしん)’이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본부】大阪府高石市 【공칭신자수】약32만명(문) 유미야마 타츠야(弓山達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