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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Links: |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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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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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2: | 근대의 교단(近代の教団) |
Title | 마루야마교 |
Japanese Title | 丸山教 |
Text | 신도계신종교이다. 이토 로쿠로베에(伊藤六郎兵衛,1829~94)가 교조이다. 로쿠로베에는 무사시국(武蔵国) 다라바나군(橘樹群) 노보리촌(登戸村) 가와사기시(川崎市) 다마구(多摩区)에서 태어나, 이토가(伊藤家)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그 후 생가의 기요미야가(清宮家)에 전해오던 마루야마코(丸山講)의 재흥에 뜻을 두고 수양과 도덕적인 신앙에 힘썼다.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 3년(明治,1870)에 아내의 병이 치유되어서 센겐(浅間)대보살에게 인사를 드리자 ‘너 자신에게 기도하라’는 계시를 듣는다. 그 후 단식 등 고행을 시작하여, 인간은 천지의 신과 동근동체(同根同体)인 것을 깨닫고, 다음 해부터 포교를 개시했다. 그 후에도 후지산 등에서 고행을 계속하고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깨달았다. 8년에 로쿠로베에의 운동은 시시노 나카바(宍野半)의 후지이치야마코샤(富士一山講社)와 합동으로 했다. 후지아치야마코샤 마루야마교회본부를 설치하자 포교 활동이 더욱 합법화되었다. 신자는 급속히 증가하여 13년에는 신도 17만축제가 행해졌다. 15년에는 후소교가 일파 독립했기 때문에 로쿠로베에의 교회는 신도후소교마루야마교회본원이라 했다. 18년, 후소교에서 독립하여 신도(神道, 본국)에 전속되고, 신도마루야마교회본원으로 개칭했다. 신자조직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로하 순서로 48조로 나누었다. 메이지 중기에는 시즈오카현(静岡県)의 ‘미쿠미(み組)’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급속히 확대되었는데 그 운동 내용이 위험하다고 여겨져서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27년에 로쿠로베에가 사망하자 교세는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양자인 이토 쿠니요시(伊藤国義,1859~1908)가 3대 교주를 계승했다. 그리고 메이지 41년에 쿠니요시가 사망하자 차남인 이토 헤이시치(伊藤平質,1883~1974)가 3대 교주를 계승했다. 헤이시치는 교조의 이름인 로쿠로베에를 이어받았다. 3대 교주는 미쿠미사건을 반성하고,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인식을 넓히는 것에 노력했다. 교조가 남긴 ‘오시라베(お調べ)’의 교주(校注) 작업도 개시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완성되었다. 쇼와(昭和) 21년 종교법인령에 의한 법인이 되어 마루야마교로 개칭했다. 27년에는 종교법인법에 의한 법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한 때 평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49년에 로쿠로베에가 사망하자, 이토 테루미(伊藤光海)가 4대 교주를 계승했다. 운동이 가나가와현(神奈川県)에서 시작되고, 후지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관동(関東)・동해(東海)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숭배대상은 부모신(おや神, 오야신)이다. 【본부】神奈川県川崎市 【공칭신자수】약1만명(문) ➠이토 로부베에(伊藤六兵衛) 이노우에 노부타카(井上順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