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Links: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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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カテゴリー2: 인물(人物)
Title
니노미야 손토쿠
Japanese Title
二宮尊徳
Text 1787~1856년. 막부말의 농정가(農政家)・사상가이다. 덴메이(天明) 7년 7월, 사가미국(相模国) 아시가라카미군(足柄上郡) 가야마촌(栢山村, 현 오다와라시小田原市)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긴지로(金次郎, 본래는 金治郎), 다카노리(尊徳)는 막부에 등용된 뒤의 휘자(諱字)인데, 후세에 음독으로 통용되었다. 홍수와 부모의 요절로 인해 극도의 빈곤과 고난을 겪었지만, 24세때에 일가를 다시 일으키고 36세 때에 번주인 오쿠보 타다자네(大久保忠真)에게 기용되어 오다와라번의 분가 지행소(知行所)인 시모츠케국(下野国) 사쿠라마치령(桜町領, 현재 도치기현栃木県 니노미야쵸二宮町)의 부흥을 명받았다. 십년동안 고심하여 이 사업을 성공시키고, 이후 여러 번(藩)과, 하타모토(旗本)의 간절한 청에 따라 손토쿠의 독특한 이념과 방법을 가진 ‘보덕사법(報徳仕法)’이 성행되었다. 가장 현저한 성적을 이룬 것은 소마번(相馬藩)이다. 덴포 14년(天保,1843), 57세로 막부 직속의 무사(御家人)가 되고 감정소(勘定所)의 어보청역격(御普請役格)이 되었지만,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받아서 불우한 10년을 보냈다. 가에이 6년(嘉永,1853)에, 닛코의 신령(神領)에 대한 부흥사업을 명받아, 문하의 인재들과 자신이 조달한 자금을 투자하여 보덕사법에 착수했다. 그러나 안세이(安政) 3년에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메이지유신까지는 후계자인 손코(尊行)와 문하의 제자들이 그 사업을 이어서 했다. 손토쿠의 사상은 ‘천지의 경문(経文)’을 읽고, 유서(儒書), 불전을 인용한 독특한 것이었다. 그는 우스개소리로 “신유불(神儒佛)은 실지로 딱 한알 분량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그 비율은 신도가 한스푼, 유불이 반스푼씩을 차지하는 정도다. 신도란 아마테라스가 도요아시하라(豊葦原)를 개척하여 미즈호(瑞穂) 나라로 만든 ‘개벽원시(開闢元始)의 대도(大道)’, 즉 인류문화 창조의 도를 의미한다. 안세이 3년 10월에 사망했는데, 향년70세였다. 손토쿠를 모신 신사는 메이지 27년(明治,1894)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의 오다와라(小田原)에, 메이지 30년 도치기현(栃木県)의 이마시(今市)에 호토쿠니노미야신사(報徳二宮神社)가 창건되어 현사(県社)에 포함되었다. 이 외에도 홋카이도(北海道)에서부터 오키나와(沖縄)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10여개의 신사가 있다. 손토쿠・보덕(報徳)에 관한 문헌은 『二宮尊徳全集』36권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다. 보덕박물관(오다와라시 미나미쵸南町)과 오다와라시 손토쿠기념관(오다와라시 가시와시柏市)에는 현(県)의 중요문화재를 포함한 풍부한 자료가 수장・전시되어 있다.
후지모리 카오루(藤森 馨)

Pronunciation in Japanese/用語音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