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Links: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詳細表示 (Complete Article)

カテゴリー1: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カテゴリー2: 인물(人物)
Title
마키 야스오미
Japanese Title
真木保臣
Text 1813~1864년. 막부말의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의 지사(志士)이다. 지쿠고국(筑後国) 구루메(久留米) 성 아래의 세노시타쵸(瀬下町)에 진좌한 미즈텐궁(水天宮)의 신관인 마키사몬 토시오미(真木左門旋臣)의 장남이다. 통칭은 이즈미(和泉), 이즈미노카미(和泉守)이고, 자는 고코(興公), 데이민(定民), 호는 시탄(紫)이다. 덴포 3년(天保,1832) 20세 때 상경하여, 진기관령(神祇官領)인 요시다가(吉田家)로부터 다이구지(大宮司)의 허가장을 받고 종오하(従五位下)에서 이즈미노카미(和泉守)에 임명되었다. 고카 원년(弘化,1844) 미토(水戸)에 놀러가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를 방문하여 존왕양이 사상을 흡수하고, 구루메로 돌아가서 덴포학(天保学)를 고취했다. 가에이 5년(嘉永,1852) 번정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여, 시모츠마군(下妻郡) 미즈타촌(水田村)에 있는 친동생 오토리이 리헤에(大鳥居理兵衛)의 집으로 칩거를 명받았다. 유배 중에 거주하고 있던 구치나시노야(山梔窩)에서 존왕양이의 지사와 만나며, 왕정복고・막부 타도의 의견을 창도하여 용명(勇名)을 떨쳤다. 분큐 2년(文久,1862)에 탈출하여 다나카 카와치노스케(田中河内介)들과 거병을 일으키지만, 데라다야의 변(寺田屋の変, 寺田屋사건. 1862년 존왕양이파인 사츠마번사 아리마 신시치有馬新七들이 간파쿠関白인 구죠 히사타다九条尚忠와 쇼시다이所司代인 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義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교토후시미京都伏見의 여관인 데라다에 결집하였는데,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가 가신을 파견하여 이를 습격, 살해한 사건)으로 좌절, 다시 유배되었다. 3년에 사면된 후, 친병두취(親兵頭取)에 임명되지만, 구루메번의 보수파들에 의해 구금되었다. 5월, 조정・죠슈번(長州藩)・쓰와노번(津和野藩)의 진력으로 포로에서 풀려나고 6월에 상경하여 학습원(学習院) 고요가카리(御用掛)가 되었다. 재경존양파(在京尊攘派)의 중심 인물이 되어, 이마난코(今楠公)로 받들여졌다. 8월 18일 정변 후, 산죠 사네토미(三条実美) 등 이른바 칠경(七卿)과 함께 죠슈번으로 갔다. 다음 해 겐지(元治) 원년, 죠슈의 세력을 이끌고 출발하였지만, 금문의 변(禁門の変,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이라고도 함. 1864년 죠슈번이 교토로 출병하여 아이즈会津・사츠마薩摩 등의 번병藩兵과 하마구리고몬 부근에서 싸워 패한 사건)으로 패하고, 동지 16명과 함께 7월 21일 덴노산(天王山)에서 자결했다. 향년 52세.
호리 미츠오(堀 光夫)

Pronunciation in Japanese/用語音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