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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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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1: |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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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テゴリー2: | 인물(人物) |
Title | 모토오리 오히라 |
Japanese Title | 本居大平 |
Text | 1756~1833년. 근세후기의 국학자이다. 옛 성은 이나가케(稲掛), 이름은 시게호(茂穂), 나중에 오히라(大平)라 했다. 모토오리 집안의 양자가 되고 소시에몬(三四右衛門)이라 칭했다. 호는 후지노카키츠(藤垣内)이다. 호레키(宝暦) 6년 이세국(伊勢国) 마츠사카(松坂, 현, 마츠사카松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문인으로 두부가게 다마루야(田丸屋)를 경영하는 이나가케 무네타카(稲掛棟隆)이다. 13세 때 입문한 이후, 항상 노리나가의 가까운 곳에서 공부했다. 아버지 무네타카가 은거한 후에는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노리나가의 장남인 모토오리 하루니와(本居春庭)가 실명하여, 간세이 11년(寛政,1799) 44세에 모토오리 집안을 보살피게 되었다. 간세이 12년에 실부가 돌아가시고, 교와 원년(享和, 1801)에 노리나가가 타계하여, 교와 2년에 정식으로 모토오리 집안의 성씨를 이어받아 하루니와를 대신하여 기슈(紀州) 와카야마번(和歌山藩)에 출사하게 되었다. 분카 6년(文化,1809)에는 와카야마에 이주하고, 노리나가학파 통괄의 중심으로서 각지의 스즈야문(鈴屋門)의 거점에 출강하며, 마츠사카의 하루니와의 노치스즈노야(後鈴屋)와 함께 스즈야문의 후진육성에 활약했다. 또 기슈번(紀州藩)에서도 크게 신뢰를 얻어, 고전의 교수나 『紀伊続風土記』를 지어서 임금에게 바치고, 국학자의 지위를 높였다. 오히라는 온후독실(温厚篤実)한 성품이고, 학풍도 온건, 고풍・후세풍 둘 다 영가(詠歌)를 잘 지었으며, 기행문도 즐겼으나, 독창성이 부족하여 어디까지나 노리나가의 조술자(祖述者)로서 평가되었다. 그러나, 노리나가의 사후 점점 확대 다양화되어 여러가지 복잡한 일이 많았던 스즈학파를 관리하여, 일대 세력으로 키워올리고, 국학의 사회적 지위를 굳혔던 수완은 평가할 만하다. 아들들을 잇달아 이어서 잃었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로 고민했지만, 세째 딸 후지코(藤子)의 남편으로 오와리(尾張)의 하마다 타카쿠니(浜田孝国)를 양자로 받아들여 우치토오(内遠)라 하고 와카야마 모토오리 집안을 잇게 했다. 덴포(天保) 4년 와카야마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 법명은 和心院意富必楽居士, 시호는 国足八十言霊大人이다. 저서에 『神楽歌新釈』, 『古学要』, 『藤野内答問録』, 『稲葉集』, 『八十浦之玉』, 『倭意三百首』, 『藤垣内集』, 『草枕の日記』, 『おかげまうでの日記』, 『有馬日記』, 『己未紀行』 등. 도쿄대학 문학부의 모토오리 문고는 와카야마 모토오리가의 구장서(旧蔵書)이다. 모리 미즈에(森 瑞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