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일본어 한글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준하나,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
●고유명사, 전문용어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하고, 일본식한자를 표기한다.
 (단, 한국에서 통용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한자 음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Links:    초보자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신도 입문 (図説による神道入門)

詳細表示 (Complete Article)

カテゴリー1: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カテゴリー2: 인물(人物)
Title
모토오리 하루니와
Japanese Title
本居春庭
Text 1763~1828년. 에도(江戸)시대 후기의 국학자이다. 통칭은 겐조(健蔵), 나중에 겐테이(健亭), 호는 노치스즈노야(後鈴屋)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장남이다. 호레키(宝暦) 13년 이세국(伊勢国) 아노군(安濃郡) 즈(津, 현재 미에현三重県 즈시津市, 어머니의 본가)에서 태어나, 이이타카군(飯高郡) 마츠사카(松坂, 현재 마츠사카松阪)에서 자랐다. 아버지 밑에서 서적의 서사작업이나 『古事記伝』 외 노리나가의 저작 판하(版下)를 담담하면서 국학의 연찬을 쌓고, 장래가 기대되었다. 그러나 간세이 3년(寛政,1791)부터 눈병을 앓고, 노리나가 부자는 물론, 스즈야문인들도 협력하여 회복을 위한 수단을 강구했지만, 6년 32세의 나이에 실명했다. 그 후 상경해서 침술을 배우고, 마츠사카에서 침술의원을 개업하여 생활했다. 아내 이기(壱岐)를 얻고나서, 여동생 미노(美濃)나 가족의 협력하에 어학연구를 중심으로 국학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와카야마번사(和歌山藩士)가 된 모토오리 가문의 성씨를 잇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나가케 오히라(稲掛大平)를 불러들였다. 노리나가가 타계한 다음 해인 교와 2년(享和, 1802), 정식으로 오히라를 모토오리 가문의 가독 계승자로서 와카야마번에 출사시켰고, 자신은 모토오리 오히라의 부양인이 되었다. 그러나 노리나가의 장남으로서 지도는 계속하고 있었고, 분카 3년(文化,1806)에는 동사의 활용을 체계화한 문법학 사상 획기적인 저서 『詞八衢』(분카 5년 간행)를 완성하여,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분카 6년 오히라가 와카야마에 이주한 후는 노치스즈노야(後鈴屋)를 열어서 마츠사카의 스즈노야문(鈴屋門)을 유지시키고 입문자를 받아들였다. 분세이 11년(文政,1828)에는 『詞通路』를 세상에 내놓고, 동사의 움직임을 다각적으로 검토했다. 문하에는 야치마타(八衢)학파라 불리는 도가시 히로카게(富樫広蔭)나 기몬(義門)들의 우수한 어학자가 배출되었다. 분세이 11년에 사망했다. 향년 66세. 법명은 明章院通言道永居士, 시호는 後鈴屋芳琉爾波翁이다. 모토오리 집의 보다이사(菩提寺, 조상의 위패를 모신 절)인 쥬쿄사(樹敬寺)에 매장되었다. 저서에는 앞서 소개한 것 외에 『後鈴屋集』, 『門の落葉』 등이 있다.
모리 미즈에(森 瑞枝)

Pronunciation in Japanese/用語音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