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사전(Encyclopedia of Shinto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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検索結果一覧(Search 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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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부 유파・교단과 인물 (第8部 流派・教団と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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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人物)
타이틀(Title) 일본어표기 본문(Text)
1 가다노 아리마로 荷田在満 1706~1751년. 에도(江戸)시대 중기의 고증학자(考証家)이다. 호에이(宝永) 3년 교토(京都)에서 태어났다. 여동생인 다미코(蒼生子)와 함께 에도에 거주하고 있는 숙부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満)의 양자가 되었다. 지병으로 고생하며 요시무네(吉宗)의 고전적(古典籍)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아즈마마로를 도왔다. 아즈마마로 사후는 아즈마마로의 유직고실(有職故実)・율령관계의 가학 계승자로서 활약했고, 막부의 명령에 따라 교토에 부임되어 다이소카이(大嘗会)의 고증을 했다. 그러나 『다이죠에벤모(大嘗会便...
2 가다노 아즈마마로 荷田春満 1669~1736년. 에도(江戸)시대 중기의 국학자이다. ‘국학사대인(国学四大人)’의 한 사람이다. 간분(寛文) 9년 정월 교토(京都)에서 태어났다. 후시미이나리샤(伏見稲荷社, 현재 후시미이나리다이샤伏見稲荷大社) 고덴요직(御殿預職)인 하구라 노부아키(羽倉信詮)의 차남이다. 어릴 적 이름은 쓰루마루(鶴丸), 성인이 되어서 노부모리(信盛), 호는 사이쿠(斎宮)이다. 소년시절부터 가학에 힘썼고 겐로쿠 9년(元禄,1696)에 별거, 독립했다. 호츠신노(法親王)를 모시고 있었는데, 13년에 가학흥륭...
3 가메이 코레미 亀井茲監 1825~1885년. 막부말 유신기의 이와미국(石見国) 쓰와노(津和野) 번사(藩士)이다. 분세이(文政) 8년 지쿠고국(筑後国) 구루메(久留米) 번주(藩主)인 아리마 요리노리(有馬頼徳)의 아들로 에도(江戸) 구루메번 저택에서 태어났다. 덴포 10년(天保,1839), 15세로 츠와노 번주 가메이 코레카타(亀井茲方)의 양자가 되어 관직을 계승하고, 종오위하(従五位下) 오기노카미(隠岐守)로 임명받았다. 이윽고 번주로서 번정을 개혁, 산업을 장려하고 문교(文教)에도 힘썼으며, 특히 국학을 중요시했다. 처음에...
4 가모노 노리키요 賀茂規清 1798~1861년 막부말 에도에서 우덴신도(鳥伝神道)를 제창한 신도가이다. 우메츠지 노리키요(梅辻規清)라고도 한다. 간세이(寛政) 10년에 교토(京都)의 가모와케이카즈치(賀茂別雷) 신사가문인 우메츠지(梅辻) 집안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사 업무를 관장하고, 종오위하(従五位下)에 임명되었다. 후에 종오위상(従五位上)에 오르고 히다노카미(飛騨守)에도 임명되었지만, 30대가 되어 신사를 친척에게 맡기고 여러 지방을 방랑했다. 문학, 역수(暦数) 등에도 밝고 실제 체험도 풍부했기 때문에...
5 가모노 마부치 賀茂真淵 1697~1769년. 에도(江戸)시대 중기의 국학자, ‘국학사대인(国学四大人)’의 한 사람이다. 겐로쿠(元禄) 10년 엔슈(遠州) 하마마츠(浜松)에서 태어났다. 교토(京都) 가모(賀茂)씨 말류인 오카베 마사노부(岡部政信)의 3남이다.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満)의 제자로 엔슈국학의 조상인 스기우라 쿠니아키라(杉浦国頭)와 그 아내 마사키(真崎)에게서 배웠다. 교호 5년(享保,1720) 구니가미가(国頭家)의 가회(歌会)에서 아즈마마로를 접했고, 13년 상경해서 입문을 하였는데, 20년에는 약 6개월...
6 가시마 노리부미 鹿島則文 1839~1901년. 막부말 메이지(明治) 시대의 근황가(勤皇家), 신관이다. 덴포(天保) 10년 정월 13일, 히타치(常陸)의 가시마(鹿島)신궁 다이구지(大宮司)인 가시마 노리타카(鹿島則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오우(桜宇)이다. 화한(和漢)의 학문을 배우고 국사에 분주하다, 게이오 원년(慶応,1865)에 하치죠지마(八丈島)에 유배되었다. 메이지 2년(1869)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재산을 투자하여 게이메이관(稽明館)을 세우고 후진의 육성에 힘썼다. 6년에, 가시마신궁 다이구지가 되고...
7 가와무라 히데네 河村秀根 1723~1792년. 에도(江戸)시대 중기의 국학자, 오와리나고야(尾張名古屋) 번사이다. 자는 기미후카(君深), 노부유키(信行) 등이다. 통칭은 긴노스케(金之助), 후쿠타로(復太郎). 호는 교쿠슈(曲州), 리츠안(葎庵). 교호(享保) 8년, 가와무라 히데츠구(川村秀世)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인 히데카이(秀穎)도 마찬가지로 국학자이다. 최초의 번주인 도쿠가와 무네하루(徳川宗春)의 세자인 쿠니마루(国丸)를 모셨다. 다음에 무네하루를 모시고 그 후에도 여러 형태로 무네하루가 서거할 때까지 가까이에서 모...
8 가와베 키요나가 河辺精長 1601~1688년. 에도(江戸) 초기의 이세신궁 시관(祠官). 다이구지쇼쿠(大宮司職)를 세습하는 오나카토미(大中臣) 성이었지만 서자 계통이었다. 어려서 출가했으나 13세 때 속세로 다시 돌아와 다이구지(大宮司)집안에 들어가 봉사했다. 53세가 되는 쇼오 2년(承応, 1653), 신궁제주(神宮祭主)인 후지나미(藤波, 오나카토미) 토모타다(友忠)가 천황의 문책을 받아 파면되고 후임으로 다이구지 가와베 사다나가(川辺定長)가 전출됨에 따라, 다이구지로 임명되었다. 데구치(出口, 와타라이度会) 노부요시(延...
9 가와이 키요마루 川合清丸 1848~1917년.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시대의 신도가, 사회교육가이다. 돗도리현(鳥取県) 도하쿠군(東伯郡)의 신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가업을 이어 받아서 다이치가키(太一垣)신사 샤쇼(社掌)가 되고, 이어서 오카미야마(大神山)신사 곤구지(権宮司)를 겸임했다. 30세 때 상경하였는데, 당시 풍조가 유럽화 되어 있어서 전통과 풍습이 황폐해진 것에 대해 우려하고 귀향하여 아메노미나카누시를 주신으로 하는 ‘신교(真教)’를 수립했다. 그리고 신관(神職)을 그만두고 다시 상경하여, 육군...
10 가와츠라 본지 川面凡児 1862~1929년. 미소기(禊) 수행을 전수하는 사단법인 미이츠카이(稜威会)의 창시자이다. 이름은 츠네지(恒次)이고 하스이케(蓮池)라는 성을 쓴 적도 있다. 호는 덴잔(殿山), 가오리노야(薫廼舎), 덴즈인(伝通院) 시기에는 연화법인(蓮華法印)이라고도 칭했다. 분큐(文久) 2년 4월 1일, 우사(宇佐)신궁 가까이에 있는 향사(郷士)인 가와츠라 나자에몬(川面仁左衛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향리(郷里)의 산중에서 수행했다. 나중에 상경해서 고이시카와(小石川)의 덴즈인에서 불교의 수행과 학...
11 가이바라 에키켄 貝原益軒 1630~1714년. 에도(江戸)시대 전기의 유학자이다. 본초학(本草学)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서민교육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지쿠젠국(筑前国) 후쿠오카(福岡)번사이다. 이름은 아츠노부(篤信), 자는 시세이(子誠), 보통 스케사부로(助三郎)라고 불렀다. 26세에 삭발하고 쥬사이(柔斎)라고도 칭했다. 그는 일찍이 일본의 전통적인 학문을 연구하는 의의를 설명하였으며(『和学一歩』), 그의 선조가 기비츠(吉備津)신사의 신관이었던 관계로 신도에도 조의가 깊었다. 이세의 외궁 신관인 데구치 노부요시(出口延佳)의...
12 가케이 카츠히코 筧 克彦 1872~1961년. 메이지(明治)부터 쇼와(昭和)시대에 걸쳐 활약한 공법(公法)학자이며, 신도 사상가이다. 메이지 5년 11월 28일, 나가노현(長野県) 스와(諏訪)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행정법연구를 위해서 메이지 31년부터 5년간 독일로 유학갔다. 귀국 후 법과대학교수에 취임하고 행정법 담당이 되었다. 그 후, 법리학, 헌법학 등 강좌도 겸임했다.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 천황은 국가 최고의 기관에 불과하다는 설)사건 후, 문부성 교학국 참여(参与)를 역임하고, 도쿄대학 퇴관 후에는 고쿠...
13 가토 겐치 加藤玄智 1873~1965년. 다이쇼(大正)・쇼와(昭和)시대의 종교학자, 신도학자이다. 메이지(明治) 6년 6월 17일, 도쿄 행정권내의 신종사원(真宗寺院)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를 졸업 후, 육군교수를 거쳐 다이쇼 10년(1921)에 도쿄제국대 조교수로 취임하여 신도강좌를 담당했다. 쇼와 6년(1931)에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교수, 그 사이에 다이쇼대학, 고마자와(駒沢)대학, 진구코갓칸(神宮皇学館)대학 등에서 종교학, 신도학, 비교사상 등을 강의했다. 한편 다이쇼 원년에 메이지쇼토쿠...
14 게이츄 契沖 1640~1701년. 근세 국학을 창시한 인물로 진언종(真言宗)의 승려이다. 간에이(寛永) 17년 세츠국(摂津国)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태어났다. 아마가사키성주(尼崎城主)인 아오야마(青山)씨를 모시던 시모카와 모토요시(下川元全)의 차남이다. 아버지는 250석의 녹봉을 받는 관료였지만, 게이츄의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닌(浪人)이 되었다. 게이츄는 7세 때 큰 병에 걸렸지만 꿈에서 텐만천신(天満天神)의 계시를 받아 회복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11세 때 오사카 이마리(今里)의 묘호사(妙法寺)에 들어가 쇼오 원...
15 게이코인 세이쥰 慶光院清順  ?~1566년. 전국시대의 여승. 이세국(伊勢国) 우지(宇治)의 게이코인(慶光院) 3세이다. 기슈쿠마노(紀州熊野)에서 태어나, 지케이쇼닌(智珪上人)의 법등(法灯)을 이었다. 신궁의 식년천궁(式年遷宮)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우선 모든 지방에 권진(勧進)해서 덴분 18년(天文,1549)에 우지바시(宇治橋)를 만들었다. 이 공적으로 고나라(後奈良)천황의 유지(綸旨)를 받고, 인호(院号)를 받게 되었다. 이어서 오기마치(正親町)천황의 유지(叡旨)를 받고, 모든 지방의 무사에게 권진하여 자금...
16 게이코인 슈요 慶光院周養  ?~1611년.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의 여승(尼僧)이다. 이세국(伊勢国) 우지(宇治)의 게이코인(慶光院) 4세이다.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신궁이 현저하게 쇠약된 것을 한탄하고, 오기마치(正親町)천황의 명령을 받들어 각국의 권화(勧化)에 힘썼다. 우선 덴쇼 3년(天正,1575)에 내궁의 가전(仮殿) 천궁(遷宮)을 수행했다. 이어서 두 신궁의 정례 천궁(遷宮)의 부흥에 착수하여 여러 지방으로부터 자재를 모집했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아주 큰 원조를 받았고,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도요토미...
17 고노 세이조 河野省三 1882~1963년. 메이지(明治)부터 쇼와(昭和)시대에 결쳐서 신관(神職), 신도연구자, 문학박사. 호는 시운(紫雲). 메이지 15년, 사이타마현(埼玉県) 기타사이타마군(北埼玉郡) 기사이쵸(騎西町)의 향사(郷社)인 다마시키(玉敷)신사의 구지(宮司) 로쿠로(禄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메이지 38년(1905) 고쿠가쿠인사범부 국어한문역사과를 졸업하고, 다마시키신사 샤시(社司)가 되었다. 41년 고쿠가쿠인연구과(도의과道義科)를 졸업하고, 다이쇼 7년(大正,1918) 같은 대학 강사・교...
18 고다이인 마하시라 後醍院真柱 1805~1879년. 분카(文化) 2년 국학자의 아들로 가고시마(鹿児島)에서 태어났다. 같은 번의 국학자인 시라오 쿠니하시라(白尾国柱), 핫타 토모노리(八田知紀)와 교류, 덴포(天保) 10년 에도(江戸)에서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에게 입문했다. 덴포 12년(1841) 고반카쿠(小番格) 고다이인 료지(後醍院良次)의 양자가 되었다. 가에이 3년(嘉永,1850), 가고시마번의 내분 ‘다카자키 붕괴(高崎崩れ)’에 말려들어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 후 용서를 받아 안세이 5년(安政,1858) 번교조사관(...
19 곤다 나오스케 権田直助 1809~1887년. 막부말 메이지(明治) 전기의 히라타파(平田派) 국학자이다. 분카(文化) 6년, 무사시국(武蔵国) 이루마군(入間郡)에서 의사인 곤다 나오노리(権田直教)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에도(江戸)에 유학(遊学)하여 막부의 의관(医官) 노마코슌인(野間広春院)에게 의학을, 아사카 시게노부(安積重信)에게 유학을 배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병원을 개업했다. 덴포 8년(天保,1837)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에게 입문, 신도를 기초로 한 ‘황조고의도(皇朝古医道)’를 외우기에 이르렀다. 분큐...
20 곤코다이진 金光大神 1814~1883년. 곤코교(金光教)의 교조이다. 어릴적 이름은 겐시치(原七), 아카자와 분지(赤沢文治)로 표기될 때도 있다. 분카 11년(文化,1814) 빗츄국(備中国) 우라미촌(占見村, 현재 오카야마현岡山県 곤고쵸金光町)의 농가, 간토리(香取)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2세 때 오타니촌(大谷村)의 가와테가문(川手家)의 양자가 되어 분지로(文治郎)라고 했다. 출세번성(出世繁盛)을 기원하고 가업에 진력을 다 하여 사회적으로도 신용을 얻었지만, 세차례 자택 건축을 할 때에 가족을 연이어 잃어서 금신(金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