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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표기 |
본문(Tex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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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류신도 |
三輪流神道 |
나라현(奈良県) 오미와(大神)신사의 진구사(神宮寺)였던 뵤도사(平等寺)・다이고린사(大御輪寺)를 중심으로 성립, 전개된 료부(両部)신도 일파의 신도설이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통상 뵤도사를 창시한 게이엔(慶円,1140~1223)이 원조로 여겨지고 있다. 그에 대한 확실한 전기인 『三輪上人行状』에 그와 진기(神祇)에 얽힌 몇 개의 사적(事跡)이 기록되어 있지만, 명확히 신도설의 설립을 보여주는 내용이 전혀 없으므로, 이것을 후세의 가탁(仮託)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이 게이엔시대에 어느 정도 이 신도설이 형성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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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미칸나기 키요나오 |
御巫清直 |
1812~1894년. 막부말부터 메이지시대에 걸친 신관, 국학자이다. 시즈마(志津摩), 쇼쇼(尚書)라 불리고, 호는 보엔(棒園)이다. 분카(文化) 9년 2월 15일에 이세국(伊勢国) 야마다(山田)의 스가하라 미츠모토(杉原光基)의 장남으로 태어나, 나중에 미칸나기 키요토미(御巫清富)의 양자가 되고 미칸나기 가문을 이었다. 덴포 9년(天保,1838)의 간나메사이달(神嘗祭月), 긴 시간동안 중단되었던 외궁 미칸나기우친직(御巫内人職)에 임명되어, 여러 제전(祭典)의 슈바츠쇼야쿠(修祓所役)로 근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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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
神酒 |
신들에게 바치는 술. 통상 ‘오미키(お神酒)’라고 불리고 또는 신슈(神酒)라고도 한다. 신센(神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다. ‘미’는 오(御,존경을 나타내는 말), ‘키는 술(酒)이라는 뜻으로 이 말이 술의 미칭 및 경칭이기 때문에 본래 귀인에게 드리는 술을 가리킨 것에서 왔다. 미키를 ‘미와’라고 한 것이 고문헌 등에 보이고, 술을 담당하는 신으로 미와신(三輪神)은 유명하다. 그리고 『고지키(古事記)』의 가요에는 ‘구시’라는 다른 이름도 보이고, 오키나와(沖縄)에는 ‘우구스’ 등의 말이 현존하고 있다. 이 말은 술의 효능을 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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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미타마교 |
みたま教 |
신도계신종교이다. 나가타 후쿠(永田ふく,1891~1975)가 교조이다. 후쿠는 젊을 때부터 신앙심이 깊어, 신사불각이나 신령스러운 산악을 참배했다. 그녀는 시집 간 집의 시아버지로부터 전래되어 오는 화상 주술을 전수 받고, 다이쇼 5년(大正,1916), 장남인 타다요시(忠義,1915~67)가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었을 때 주술적으로 고쳤다. 그 이후, 신령의 힘을 느끼게 되었다. 잠시 아키타현(秋田県) 오다테쵸(大館町)에서 온타케코(御嶽講)의 안내인으로 근무하였지만, 후소교(扶桑教)에 소속되어 있던 어머니가 도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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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마야 |
御霊屋 |
조상의 영이나 귀인의 영을 제사지내는 장소나 시설을 말한다. 오타마야, 레이뵤(霊廟)라고도 한다. 고대의 집 마츠리는 4월(또는 2월)의 기넨사이(祈年祭)와 11월의 니이나메사이(新嘗祭)로, 우지가미(氏神,야카츠가미)와 우카노미타마나 가마도가미(竃神)를 동시에 제사지냈다. 이것은 조상신의 영도 기원을 따져 보면 벼에서 얻은 신의 영이라고 하는 고대인의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헤이안(平安)시대에는 온료(怨霊)신앙이 발달하고, 게다가 정토교(浄土教)의 보급이나 시세의 불안 등에 의해, 죽은 사람을 위한 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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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노부토모 |
伴 信友 |
1773~1846년 에도(江戸) 후기의 국학자 와카사국(若狭国) 오하마번사(小浜藩士)이다. 초명(初名)은 고레노리(惟徳)이고, 호는 고토이(特), 고토이(事負)이다. 안에이(安永) 2년 와카사국 오뉴군(遠敷郡,현재 후쿠이현福井県 오하마시小浜市)에서 태어났다. 오하마번사 야마기시 코레토모(山岸惟智)의 4남이다. 어머니는 오하마번사 가타오카 요시오(片岡良雄)의 차녀인 사요이다. 덴메이 6년(天明,1768) 에도즈메(江戸詰, 에도시대에 여러 지방의 다이묘大名, 가신家臣 등이 에도에 와서 근무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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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츠구 |
別宮 |
혼샤(本社), 혼구(本宮) 등으로 칭하는 중심이 되는 신사와 혼마츠(本末)의 관계에 있는 신사. 벳샤(別社)로 불리기도 있다. 실제로 베츠구로 불리는 신사와 혼구, 혼샤와의 관계에는 몇가지의 경우가 있는데, 이마미야(今宮), 신구(新宮), 셋샤(摂社)・맛샤(末社) 등으로 불리는 것과 기본적인 관계는 유사하다. 혼샤・혼구와 동일한 제사권 내에 있는 경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의 것과 이세신궁(伊勢神宮)의 것이 있다.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은 중세 때 모든 지방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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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표신사 |
別表神社 |
신사본청(神社本庁)이 전국의 신사 중에서 유서(由緒), 활동 등을 고려해서 정한 신사로, 본청의 관리직 진퇴에 관한 규정 제5조에 ‘별표에 기입된 신사’로서 특별히 지정된 신사의 통칭. 벳표신사의 구지(宮司)・곤구지(権宮司)는 그 진퇴에서 신사청장(神社庁長)의 결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또 규정 제13조에 의하면 벳표신사의 구지・곤구지는 메이카이(明皆)이상, 네기(禰宜)・구지대무자(宮司代務者)는 세이카이(正皆)이상, 또 곤네기(権禰宜)는 곤세이카이(権正皆)이상의 신직개위(神職階位)를 필요로 한다. 이 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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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슌 |
梵舜 |
1553~1632년.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에도(江戸) 초기의 승려 신도가이다. 신류인(神龍院) 또는 류겐(龍玄)이라고도 불렸다. 덴분(天文) 22년, 요시다(吉田)신도의 종가인 요시다 카네미기(吉田兼右)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네미(兼見)는 형이다. 증조부인 카네토모(兼倶) 이래의 요시다신도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신서고전(神書古典)의 서사교합(書写校合)을 행하고, 그것의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요시다문고(吉田文庫,天理図書館蔵)에 남아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도 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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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카신도 |
仏家神道 |
불가(仏家)에 의해 만들어진 신도. 붓케신도라고도 읽는다. 중세에 보급, 성행한 신불습합의 신도설이다. 크게 진언종계(真言宗系)와 천태종계(天台宗系)의 두 파로 구분된다. 진언계는 구카이(空海) 저작에 가탁(仮託)하는 『麗気記』와 교키(行基)의 저작에 가탁하는 『大和葛城宝山記』 및 이세 호라쿠사(法楽寺) 쓰카이(通海)의 『参詣記』 등을 거쳐서 형성되었다. 주된 취지는 진언밀교(真言密教)의 금강(金剛), 태장(胎蔵) 두 이치를 이세(伊勢)의 내궁(内宮)・외궁(外宮) 양궁의 이치에 맞춰서 설명하는 것을 비롯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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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츠네히코 |
佐藤経彦 |
1834~1906년. 신리교(神理教) 교조이다. 덴포(天保) 5년 2월 16일, 부젠국(豊前国) 기쿠군(企救郡) 도쿠리키(徳力,현재 기타큐슈시北九州市 고쿠라미나미구小倉南区)에서 태어났다. 사노 츠네카츠(佐野経勝)의 장남이다. 청년시절에 니시다 나오카이(西田直養)에게 국학을 배웠고, 또 의학도 배워서 황국의도(皇国医道)를 창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종교가에 뜻을 두고 가전(家伝)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왕성한 저작활동을 했다. 메이지 8년(明治,1875)부터 다음 해에 걸쳐 가끔 영험한 계시(霊告)를 받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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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하라신사 |
サムハラ神社 |
신도계신종교이다. 다나카 토미사부로(田中富三郎,1868~1967)가 오카야마현(岡山県)의 황폐한 신사를 쇼와 10년(昭和,1935)에 재흥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토미사부로는 전쟁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경험에서 ‘사무하라’라는 글자가 부적으로서의 힘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소판형의 부적을 만들어서 무료로 배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포교활동으로 당국으로부터 무허가신사를 판로(販路)확장에 이용했다는 혐의로, 새로 건립한 신덴(社殿)도 11년에 철거 소각 처분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출정병사에게 부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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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키 아리요시 |
佐伯有義 |
1867~1945년. 메이지(明治)부터 쇼와(昭和)시대에 걸친 고증학자(考証学者). 게이오(慶応) 3년 9월, 도야마현(富山県) 나카니이카와군(中新川郡)에서 다테야마(立山)의 오야마(雄山)신사 사직(祀職)인 사에키 아리히사(佐伯有久)의 아들로 태어났다. 메이지 15년(1882)에 상경하여 20년 고덴코큐죠(皇典講究所)를 졸업, 23년부터 『古事類苑』편찬에 종사하고 진기부(神祇部) 등을 담당했다. 37년 궁내성(宮内省)의 장전(掌典), 38년에는 제실제도(帝室制度)조사국으로부터 황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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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타리 히로모리 |
猿渡容盛 |
1811~1884년. 막부말 유신기의 신관(神職), 국학자이다. 분카(文化) 8년, 무사시국(武蔵国) 후츄로쿠쇼노미야(府中六所宮, 오쿠니타마大国魂신사)의 간누시(神主)인 사와타리 모리아키(猿渡盛章)의 아들로 태어났다. 덴포 6년(天保,1835) 아버지를 따라 오야마다 토모키요(小山田与清)에게 입문, 많은 학자 문인들과 교류했으며, 이윽고 아버지인 모리아키와 함께 쇼몬(松門)의 십철(十哲)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배우기까지 이르렀다. 봉무사(奉務社)의 로쿠쇼노미야 및 소쟈(総社)연구를 라이프워크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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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덴 |
斎田 |
신전(神前)에 올리는 신성한 쌀이나 미키(神酒)를 만들기 위한 벼를 수확하는 논. 일반적인 신사에서 사용되는 예가 있지만, 특히 다이죠사이(大嘗祭)에 사용되는 미케(御饌)・미키를 수확하기 위한 논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이다(祝田), 누키호덴(抜穂田)이라고도 한다. 다이죠사이에 앞서 유키(悠紀)・스키(主基) 두개의 사이덴이 정해진다. 옛날에는 보쿠죠(卜定)로 정했지만, 메이지 42년(明治,1909)의 등극령(登極令) 제8조에 ‘다이죠사이의 사이덴은 교토 동남을 유키지방으로 하고, 교토 남북을 스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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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센 |
賽銭 |
원래는 기원성취를 위한 참배 때에 호사이(報賽)로서 신불에게 바치는 공물의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신사나 절에 기원・숭경의 표현으로 헌납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항례행사의 공진물과는 다르며, 주로 개인의 임시적인 기원을 목적으로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옛날에는 신전에 쌀을 뿌리는 산마이(散米), 혹은 씻은 쌀을 종이에 싸서 바치는 오히네리가 있었다. 그것이 중세후기 이후에 화폐경제가 확산되고, 또 서민이 다른 지방의 신사나 절을 참배하는 것이 성행됨에 따라, 쌀 대신에 동전을 헌납하는 산센(散銭)이 되었다. 즈루가오카하치만궁(鶴岡八幡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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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죠 |
斎場 |
신을 모시고, 마츠리의 의식을 행하기 위한 장소. 신사에서 재장원(斎場院), 재장소(斎場所)라고 불리는 시설. 상설인 곳과 가설인 곳이 있다. 다이죠사이(大嘗祭)에서 헌상된 곡물을 비롯해서 신센(神饌)을 준비하기 위해 설치된 건물이나 그 전체를 말하고, 다이죠사이가 끝나면 즉각 철거한다. 또 교토의 요시다(吉田)신사에는 재장소로써 다이겐큐(大元宮)를 둘러싸는 시설이 있으며, 에도(江戸)시대에는 진기관(神祇官)의 핫신덴(八神殿)도 이 곳에 두었다. 다이겐큐는 가야부키(茅葺) 핫카쿠즈쿠리(八角造り)이고 다이겐손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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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칸 |
斎館 |
신사(神事)에 앞서 신관(神職) 등 봉사자가 머물면서 목욕재계(潔斎, 겟사이)를 하기 위한 건물. 이세신궁(伊勢神宮)에는 네기(禰宜), 우친도(内人), 모노이미(物忌)들이 각각 이미비타키야(斎火炊屋) 등의 부속되는 사이칸을 가지고 슈쿠칸(宿館)이라고도 하였다. 기시키쵸(儀式帳)에도 기재되어 있는 시설이다. 일반 신사에서는 메이지 이전은, 다이샤(大社)에서도 제사자의 목욕재계(斎戒, 사이카이)가 일반적으로 역택(役宅)에서 행해졌다. 특히 사이칸이 생기게 된 것은 메이지시대 신사의 모든 시설에 대한 규격을 정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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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키 |
榊 |
제사 때에 다마구시(玉串) 등과 같이 신전에 바쳐지는 나무. 타마구시의 경우, 이것에 시데(紙垂)와 같은 종류를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장식, 하라에 도구, 신지마이(神事舞) 때의 도리모노(採物)로서도 이용되어진다. 또 샤덴(社殿), 다마가키(玉垣) 등에 붙여서 신역(神域)을 나타내기도 한다. 賢木, 坂木 등으로도 표기한다. 의미는 항상 번창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번영을 상징하는 사카에기(栄木), 신역을 나타내는 것에서 사카이기(境木) 등 몇가지의 설이 있다. 『고지키(古事記)』의 진다이마키(神代巻)에 보면, 아마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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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노부히로 |
佐藤信淵 |
1769~1850년. 에도(江戸)후기의 경제학자. 자는 겐카이(玄海), 통칭은 모모스케(百祐). 호는 친엔(椿園), 쇼안(松庵), 유사이(融斎) 등. 메이와(明和) 6년, 데와국(出羽国) 오카치군(雄勝郡)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사토 노부타카(佐藤信孝)의 장남. 덴메이 원년(天明,1781) 13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오우(奥羽)・관동(関東)을 편력하는 도중, 덴메이의 대기아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접하고 만민을 구하기 위한 경세구민(経世救民)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아버지의 사후, 덴메이 4년 16세 때 에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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